2020년 가을 소풍 후기

2020년 가을소풍을 다녀와서 !


동기들의 친목 모임은 물론 사회 각 활동들을 위축 고립되게 만든 코로나 사태.


그 여파로 거의 한 해를 집에 갇혀 답답해 하시던 어부인들을 모시고
간단한 바깥 나들이나 해보자는 취지로 시작한 60회 가을소풍!

소풍 다녀오듯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을 물색하러, 회장단이 3개월여에 걸쳐 여러 곳을 미리 확인하여 최종 정한 곳은 "여주 신륵사와 영릉"


그러나 소풍 실행 여부의 중점은 코로나 예방작업.

적외선 체온계나 세정제, 마스크 등 방역품의 준비는 돈만 들이면 해결 가능하나, 

그 중 가장 까다로운 하나가 소풍중 식사를 하는 문제... 

도시락을 나누기에는 인원이 많아지면 앉을 자리가 곤란하고, 식당이라면 예방을 위해

식당 4인 테이블에 두명씩만 앉고도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있는 크기여야 하고,

또한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1테이블에 2명씩 앉도록 배식하는 식당측의 협조였다.


그리고 또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동기들의 참여 호응.

사전 준비를 다 마치고, 홈페이지 등으로 동기들의 참가접수를 시작했다.

하나 둘 신청이 오고, 최종으로 51명이 참가키로... !


회장단은 용기를 얻어 즐거운 가을소풍에 앞장 섰다.

일정은 신분당선 판교역에서 만나,
"전철로 여주역 이동- 관광버스로 여주 방문지 순회- 점심 식사- 신륵사- 영릉 효종릉 입구- (효종릉> 세종릉)- 여주역 해산"

  (처음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한 소풍 모임을 시작해 보았다)



가을소풍 참가자 총 50명


부부 참가 40명

윤규식, 오규원, 이민웅, 김재웅, 신동오, 김도명, 박병호, 장석규, 박세복, 김홍건,
김제환, 손명호, 박성수, 박근식, 강일홍, 이명순, 유춘희, 조정근, 이훈석, 양만기


단독 참가 10명

강희만, 홍성혁, 박지창, 이승일, 이흥남, 박성도, 김수동, 박영원,이철식, 윤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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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한 식사_ 마주 웃으며 식사할 친구가 멀리 앉았으니 ^^
   (덕분에 음료 매상이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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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후 도보로 신륵사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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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사적비(事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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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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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보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신륵사는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의 원찰(願刹)로 지정되어 1472년(성종 3) 대규모의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는데, 극락보전 역시 왕릉 원찰로 지정되면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800년(정조 24)에 다시 중창한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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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제225호)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은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2단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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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르면 보제존자(나옹선사)석종과 석종비 (보물 제229호)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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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존자석종 (보물 제228호)

여주 신륵사 普濟尊者石鐘은 신륵사 뒤편에 모셔져 있는 보제존자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 위에 받침 2단을 쌓은 후 종 모양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되어 있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어져 있으며, 앞쪽과 양옆에는 계단이 있다. 탑신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가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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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당 (보물 제180호)

향나무 뒤로 여주 신륵사 조사당이 보인다. 조사당은 낮은 기단 위에 앞면 1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앞면에는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였고, 옆면에는 앞 1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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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향나무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해지며, 빼어난 수형을 자랑한다. 신륵사와 역사를 같이한 희귀 수목으로 1982년 10월 15일 신륵사 은행나무와 함께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수령은 약 500년이고, 나무 높이 5m·나무 둘레 1.3m·나무가 차지하는 면적은 25㎡이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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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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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다층전탑 (보물 제226호)

여주 신륵사 多層塼塔은 아래로 한강이 보이고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전탑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몇 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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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은행나무와 관세음보살

고려말 나옹선사가 심은 은행나무라 전해지며 수령은 660년이 되었다 한다.

아름다운 노란 단풍을 기대했었는데, 며칠사이 비바람으로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고,
대신 나무 줄기 사이로 관세음보살님의 실루엣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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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든 구룡루 앞계단에서 단체로 한 컷... 50명이 같이 왔는데 10여명은 외출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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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릉 쪽 입구에서 차를 내려 영릉(寧陵, 효종대왕릉)에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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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齋室)

효종대왕릉(영릉 寧陵) 입구에 있는 재실은 2007년 왕릉재실중 최초로 보물 제1532호
‘조선효종영릉재실’로 지정되었다. 재실(齋室)이란 제관(祭官)의 휴식, 제수장만과 제기 보관 등의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은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 또는 원형이 훼손됐음에도 불구, 효종대왕릉(寧陵) 재실은 안향청, 제기고, 재방, 전사청, 행랑채(대문 포함), 우물 등의 시설이 온전하게 보존돼,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고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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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대왕릉(寧陵) 재실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495호로 지정돼 있는 회양목과 곧게 하늘로 뻗은 향나무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느티나무 고목(위 사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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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寧陵)

조선 제17대 임금인 효종대왕(1619~1659, 재위 1649~1659)과 왕비인 인선왕후 장씨의 두기의 능이 있다. 원래 효종대왕의 릉은 1659년 경기 양주군 건원릉(현 경기 구리시 동구릉)의 서쪽에 조성하고 능호를 익릉(翼陵)이라 하였으나, 1763년 석물에 틈이 생겨 현 위치로 능을 옮겨오면서 능호를 영릉(寧陵)으로 고치고 재실도 함께 옮겨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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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릉(英陵)과 효종릉(寧陵)은 "왕의 숲길"이라는 약 700여 미터 가량의 능선을 넘는 길로 이어진다. 숲길은 거의 소나무로 이루어져 들숨마져 향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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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陵 (세종대왕릉) 홍살문 

홍살문은 두 개의 기둥을 양쪽에 두고 기둥과 기둥 사이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뾰족한 나무를 나란히 박아 연결하고, 그 가운데에는 삼지창을 설치하거나 태극 문양을 설치하기도 한다. 홍살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은 붉은색으로 칠했고 상부에 설치한 나무살 때문이다. 붉은색은 악귀를 물리치고 나쁜 액운을 화살 또는 삼지창으로 공격한다, 즉 신성시 되는 장소를 보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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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英陵)

조선 제4대 왕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1395∼1446)를 합장한 무덤이다.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죽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의 서쪽 산줄기에 쌍실을 갖춘 능이 조성되었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 때 영릉의 터가 좋지 않다 하여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나왔고, 1469년(예종 1) 현 위치로 옮겼다. (두산백과)


정자각(丁字閣)

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능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건물로 그 모양이 ‘丁’자와 같아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불렀다. 정자각은 봉분 아래에 있으며, 정자각 앞으로는 박석을 깐 삼도(三途)가 있고 삼도 맨 앞에는 홍살문이 놓인다. 정자각 좌우로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대칭으로 놓여 정자각 제례에 필요한 간단한 준비를 할 수 있다. 물론 본격적인 준비는 홍살문 밖에 있는 재실에서 이루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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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지은 英陵 재실(齋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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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못 한가운데에 둥근 섬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이라고 한다. 즉 네모진 못의 윤곽은 땅을, 둥근 섬은 하늘을 뜻한다. 
이는 음양의 결합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대자연의 섭리를 상징하며 자손이 번영되기를 기원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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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숲 사이, 스며든 햇살로 붉게 타오르는 마지막 단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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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부일구(仰釜日晷)

천구의 모양을 본 떠 만든 반구 형태의 해시계. 앙부일구는 세종 때에 처음 제작하였는데, 종묘 남쪽 거리와 혜정교 옆에 설치하여 공중용 해시계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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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루(自擊漏)

자동으로 시보를 알려주는 장치가 되어 있는 물시계.

1434년(세종 16) 왕명으로 장영실·김조·이천 등이 제작하였다. 시(時)·경(更)·점(點)에 맞추어 종과 북·징을 쳐서 시각을 알렸으며, 경복궁 경회루 남쪽 보루각에 있었던 것은 3개의 파수호(播水壺)와 2개의 수수호(受水壺), 12개의 살대, 동력전달장치와 시보장치로 되어 있었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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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역사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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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경(編磬)

나무틀인 가자에 ㄱ자 모양의 경돌 16매를 음률의 순서에 따라 위아래 2단으로 나누어 홍승으로 묶어 놓고 각퇴로 쳐서 소리를 내는 악기.

고려 예종 11년 6월에 편종과 함께 송나라에서 들어 와, 이후 세종시대 때(1425년)가 되어 대체할 수 있는 경돌이 국내에서 발견되고, 1427년 세종 9년 5월 되어서야 새로이 경 한 틀(12매)을 제작하여 완성했다.

편경은 그 소재가 석회암과 대리석이 섞인 경석이기에 온도나 습도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연주할 때마다 조율할 필요가 없다. 항상 일정한 음높이를 유지할 수 있어서 편경은 아악에서 표준악기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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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장님, 50여명의 대인원이 움직였는데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대단하십니다.

    마음으로 참가한 
    뚱강 이기성올림
    회장님...!
    가을소풍 후기와 추억에 남을 사진들과 사료 자료들까지 꼼꼼히 준비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행 기획 프로 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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